신라의 삼국통일, 어떻게 가능했을까? 나당연합부터 나당전쟁까지
신라의 삼국통일은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해 이루어진 결과가 아닙니다.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을 받던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두 나라를 차례로 무너뜨린 뒤, 다시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 만들어진 역사적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신라는 왜 당나라와 손을 잡았을까요?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왜 동맹국이었던 당나라와 싸워야 했을까요?
이 글에서는 나당연합이 만들어진 배경부터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나당전쟁의 전개까지 살펴보며 신라의 삼국통일이 가능했던 이유와 그 한계를 알아보겠습니다.
📕 CONTENTS

1. 신라는 왜 당나라와 나당연합을 맺었을까?
삼국시대 후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을 동시에 받으며 어려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특히 642년 백제가 신라의 대야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공격해 빼앗으면서 신라의 위기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신라는 군사적 대응과 함께 외교적인 해결책도 모색했습니다.
김춘추는 642년 고구려를 찾아가 군사 협력을 요청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643년에는 당나라에 동맹을 제의했으나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국제 정세가 달라졌습니다. 당나라는 645년 고구려 원정에서 원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습니다.
신라 역시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할 군사적 지원이 절실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춘추는 648년 직접 당나라를 방문해 당 태종과 군사동맹을 논의했습니다.
그 결과 신라와 당나라의 군사 협력이 구체화되었고, 이후 양국은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협력하게 됩니다.
❔ 관련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의 김춘추 관련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신라와 당나라가 완전히 같은 목적을 가지고 동맹을 맺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에서 벗어나 국가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반면 당나라는 고구려를 정복하고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당연합은 공동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만들어진 동맹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시작된 협력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지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오히려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을 불러오게 됩니다.
2. 나당연합군은 어떻게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을까?
660년 백제 멸망과 황산벌 전투
나당연합군이 먼저 공격한 나라는 백제였습니다.
660년 당나라군은 소정방의 지휘 아래 바다를 건너 백제를 공격했고, 신라군은 김유신 등을 중심으로 육로를 통해 진격했습니다.
백제는 당나라군과 신라군의 협공을 받으며 방어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대표적인 전투가 황산벌 전투입니다.
백제 장군 계백은 적은 병력으로 신라군에 맞서 저항했지만, 결국 신라군의 진격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후 나당연합군이 수도 사비를 공격하면서 백제의 방어 체계는 무너졌고,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는 멸망했습니다.
❔ 백제 멸망의 과정과 당시 상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의자왕 항목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제의 멸망이 곧바로 모든 저항의 종결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백제 유민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이 이어졌고, 옛 백제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도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668년 고구려 멸망과 내부 권력 다툼
고구려는 백제보다 훨씬 오랫동안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낸 나라였습니다.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쳤고, 당나라와의 전쟁에서도 강력한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장기간의 전쟁으로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내부적인 위기까지 맞았습니다.
665년 무렵 연개소문이 사망한 뒤 그의 아들 남생과 남건·남산 사이에서 권력 다툼이 발생했습니다.
특히 남생은 동생들과의 갈등 끝에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고구려 지배층의 분열은 당나라가 군사 작전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후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이 이어졌고,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도 멸망했습니다.
❔ 고구려의 멸망 과정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고구려 항목과 삼국통일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백제와 고구려는 모두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무너졌지만, 멸망에 이르는 과정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백제는 나당연합군의 협공과 수도 함락으로 왕조가 무너졌고, 고구려는 장기간의 전쟁에 더해 지배층의 분열이 겹치면서 저항력이 약화되었습니다.
두 나라가 사라지면서 신라의 입지는 크게 강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신라가 원했던 결과가 완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을 누가 지배할 것인지라는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신라와 당나라는 왜 적이 되었을까?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신라와 당나라의 협력 관계가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두 나라가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는 서로 다른 목표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핵심은 옛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 그리고 한반도의 지배권이었습니다.
신라는 백제의 옛 땅을 확보하고 한반도에서 독자적인 지배 기반을 마련하려 했습니다.
반면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지역에 통치 기구를 설치해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당나라는 백제의 옛 땅에 웅진도독부를,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습니다.
또한 신라에도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신라왕을 계림주도독으로 삼으려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는 신라가 당나라의 통치 질서에 편입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갈등 요인이었습니다.
❔ 관련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매소성전투 항목에 설명된 나당전쟁의 배경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라 입장에서는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는 데 협력했던 당나라가 이제 한반도에서 자신의 지배권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 셈입니다.
당나라가 한반도 전체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신라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이 때문에 신라는 당나라에 맞서 군사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670년부터 본격화한 나당전쟁은 동맹국이었던 두 나라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충돌한 전쟁이었습니다.
결국 나당전쟁은 단순히 양국의 관계가 나빠져 벌어진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삼국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일치했던 이해관계가 전쟁 이후 달라졌고, 영토와 지배권을 둘러싼 갈등이 군사적 충돌로 이어진 것입니다.
4. 나당전쟁의 전개와 신라의 승리
나당전쟁은 670년부터 676년까지 이어졌습니다.
신라는 당나라의 군사적 압박에 맞서 백제의 옛 땅을 확보하고, 한반도에서 독자적인 지배권을 지키려 했습니다.
전쟁 초기에 신라가 일방적으로 우세했던 것은 아닙니다.
당나라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반격했고, 신라도 석문 전투와 같은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675년 매소성 전투
나당전쟁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전투 가운데 하나가 675년 매소성 전투입니다.
매소성은 나당전쟁 당시 당나라군이 주둔했던 주요 거점으로, 신라군은 이곳에서 당나라군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는 당나라의 육상 작전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다만 매소성 전투 하나만으로 전쟁의 전체 결과를 설명하기보다는, 전후에 이어진 여러 전투와 보급 문제까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전투의 구체적인 내용과 관련 사료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매소성전투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676년 기벌포 전투와 당나라의 철수
675년의 전투 이후에도 당나라는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676년에는 서해를 통한 작전이 이어졌고, 신라군은 기벌포에서 당나라 수군과 싸웠습니다.
기벌포 전투는 나당전쟁의 마지막 국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역사넷의 한국사 연대기 자료에 따르면, 신라군은 기벌포에서 당나라군을 격퇴했고, 당나라는 한반도에서 군사적 위치를 유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당나라가 물러난 이유를 신라의 군사적 승리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당나라는 서쪽에서 토번의 공격을 받았고, 장기간 이어진 전쟁으로 병력과 보급을 운용하는 데도 부담이 커졌습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역시 당나라의 전략 변화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 나당전쟁의 전체 전개는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의 신라·당 전쟁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676년 당나라가 한반도에서 물러나면서 나당전쟁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신라는 한반도 중남부를 중심으로 지배권을 확보했고, 통일신라 시대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 연도 | 주요 사건 | 의미 |
|---|---|---|
| 648년 | 나당 군사동맹 성사 | 백제·고구려 공격을 위한 협력 기반 |
| 660년 | 백제 멸망 | 삼국의 세력 균형 변화 |
| 668년 | 고구려 멸망 | 옛 영토의 지배권을 둘러싼 갈등 심화 |
| 675년 | 매소성 전투 | 신라가 당나라군을 상대로 거둔 주요 승리 |
| 676년 | 기벌포 전투 및 당나라의 철수 | 나당전쟁 종결과 신라의 지배권 확보 |
5. 신라의 삼국통일이 지닌 의미와 한계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교 전략과 군사적 대응, 국제 정세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신라는 처음부터 백제와 고구려를 동시에 압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김춘추의 외교를 통해 당나라와 동맹을 맺었고, 나당연합군의 군사력을 활용해 두 나라를 차례로 무너뜨렸습니다.
이후에는 당나라의 지배 시도에 맞서 전쟁을 벌여 한반도에서 독자적인 지배 기반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통일에는 분명한 한계도 있었습니다.
신라가 고구려의 옛 영토 전체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으며, 고구려의 옛 영토 상당 부분에서는 이후 발해가 성장했습니다.
따라서 신라의 삼국통일은 한반도 전체를 완전히 하나로 통합한 사건이라기보다, 한반도 중남부를 중심으로 통일 국가의 기반을 마련한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삼국통일의 의미와 한계에 관한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삼국통일 항목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신라의 통일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교로 부족한 힘을 보완하고, 동맹국과의 이해관계가 달라졌을 때 다시 대응했다는 점에서 당시 국제 정세와 신라의 전략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6. 신라의 삼국통일 자주 묻는 질문
신라가 당나라와 나당연합을 맺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을 동시에 받는 상황에서 군사적 지원이 필요했습니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 정복과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원했기 때문에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습니다.
백제와 고구려는 각각 언제 멸망했나요?
백제는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했고, 고구려는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했습니다.
신라는 왜 당나라와 전쟁을 벌였나요?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가 옛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신라는 이에 맞서 한반도에서 독자적인 지배권을 지키려 했고, 그 결과 670년부터 676년까지 나당전쟁이 이어졌습니다.
신라의 삼국통일 핵심 정리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사건의 연도를 외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각 사건이 왜 이어졌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을 극복하기 위해 당나라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나당연합군은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영토와 지배권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고, 신라는 당나라와 전쟁을 벌여 한반도 중남부의 지배권을 확보했습니다.
결국 나당연합과 나당전쟁은 서로 별개의 사건이 아닙니다.
공동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형성된 동맹이 전쟁 이후 서로 다른 목표와 이해관계로 인해 갈등 관계로 바뀐 역사적 과정이었습니다.
신라의 통일이 지닌 의미를 살펴볼 때는 통일의 성과뿐 아니라 고구려 옛 영토를 모두 차지하지 못했다는 한계도 함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고 자료 및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태종무열왕 김춘추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신라·당 전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의자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고구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매소성전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삼국통일
자료 확인일: 2026년 10월 13일
이 글은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주요 사건의 배경과 전개를 정리했습니다. 세부적인 역사 해석은 사료와 연구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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