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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어떻게 해동성국이 되었고 왜 멸망했을까? 대조영부터 926년까지

한장의 역사 2026. 7. 16. 16:07

발해 정효공주 묘 벽화 속 발해인의 모습
발해 정효공주묘 벽화에 남아있는 당시 인물의 모습

 

698년 대조영이 세운 발해는 고구려 멸망 이후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무대로 성장한 국가입니다.

 

건국 초기에는 주변 세력과 경쟁했지만, 무왕·문왕·선왕을 거치며 영토를 넓히고 국가 운영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선왕 시기에는 '해동성국'이라고 불릴 만큼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발해는 926년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했습니다.

 

발해는 어떻게 강국으로 성장했고, 전성기를 누리던 국가가 왜 무너졌을까요?

 

건국부터 성장과 멸망까지 살펴보면 발해가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차지했던 위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고구려 멸망 이후, 대조영은 왜 발해를 세웠을까?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옛 고구려 영토를 지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만주 일대에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을 비롯한 여러 집단이 남아 있었고, 이 지역을 둘러싼 세력 간 경쟁도 계속되었습니다.

 

발해 건국의 출발점은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이 이끄는 집단과 걸사비우가 이끄는 집단의 동쪽 이동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걸사비우가 당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뒤에는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을 이끌었습니다.

 

대조영 세력은 당군의 추격을 물리치고 동모산 일대에 기반을 마련해 698년 새로운 국가를 세웠습니다.

 

발해의 건국은 고구려 멸망 이후의 혼란 속에서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한 사건이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말갈을 비롯한 여러 집단을 아우르는 독자적인 국가로 성장했습니다.

 

따라서 발해의 역사를 이해할 때는 고구려와의 계승 관계뿐 아니라, 만주 지역의 다양한 세력이 하나의 국가 체제 안으로 통합되는 과정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건국 당시 발해의 국호는 사료에 따라 진국(振國 또는 震國)으로 기록됩니다.

 

713년 당나라가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한 뒤 발해라는 명칭이 역사 기록에 등장합니다.

 

초기 국호의 한자 표기는 사료에 차이가 있어 하나의 표기로 단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2. 무왕·문왕·선왕, 발해는 어떻게 성장했을까?

무왕: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넓히다

무왕 시기 발해는 주변 세력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며 군사력을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발해의 성장은 당나라와의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당나라는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주변 세력과 관계를 맺었고, 발해 역시 이에 대응하며 독자적인 대외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732년에는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군이 당나라의 산둥 지역에 있는 등주를 공격했습니다.

 

이 사건은 발해가 주변 지역에 머무르는 세력이 아니라, 당나라와 군사적으로 맞설 수 있는 국가로 성장했음을 보여 줍니다.

문왕: 외교와 제도를 통해 국가 기반을 다지다

문왕 시기에는 당나라와의 관계가 점차 안정되면서 사신 파견과 문물 교류가 이어졌습니다.

 

발해는 당나라의 제도를 참고해 중앙 정치 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등 독립적인 국가 운영을 이어 갔습니다.

 

수도를 옮긴 것도 국가 운영의 중심을 정비하는 과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수도는 정치와 행정의 중심이자 주요 교통로와 연결되는 거점이었습니다.

 

따라서 발해의 발전은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영토를 넓히는 것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넓어진 지역을 다스릴 제도와 외교 관계를 함께 갖추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선왕: 해동성국의 전성기를 이루다

818년 즉위한 선왕 시기에는 발해가 다시 크게 성장했습니다.

 

발해는 말갈의 여러 세력을 복속시키며 영토를 확대했고, 서쪽으로 요동 지역까지 영향력을 넓혔습니다.

 

영토가 넓어지면 그만큼 통치해야 할 지역도 많아집니다.

 

발해는 이를 관리하기 위해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고 주요 거점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운영했습니다.

 

당나라·일본·신라 등과의 교류에 활용된 교통로는 외교 사절과 물자가 오가는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발해의 전성기는 군사적 확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넓어진 영토를 다스리는 행정 체제,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망, 주변국과의 외교와 교역이 함께 발전하면서 국가의 영향력이 커졌습니다.

 

발해가 '해동성국', 즉 동쪽의 번성한 나라로 불린 배경도 이러한 성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3. 3성 6부와 5경 15부 62주, 발해는 넓은 영토를 어떻게 다스렸을까?

 

발해는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중앙 정치 조직과 지방 행정 체제를 마련했습니다.

 

국가의 규모가 커질수록 각 지역을 연결하고 중앙의 명령을 전달할 제도가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중앙에는 정당성·선조성·중대성의 3성과 충부·인부·의부·지부·예부·신부의 6부를 두었습니다.

 

당나라의 제도를 참고했지만, 발해에서는 정당성이 중심 관부 역할을 하는 등 독자적인 운영 방식도 나타났습니다.

 

지방은 5경 15부 62주로 나누어 관리했습니다. 5경은 상경·중경·동경·남경·서경을 가리킵니다.

 

주요 거점과 행정 구역을 마련한 것은 넓어진 영토를 통치하고 중앙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발해의 교통로도 주목할 만합니다. 사료에는 일본도·신라도·조공도·영주도·거란도 등 다섯 교통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길은 발해가 주변국과 연결되고 외교와 교역을 이어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발해의 행정 체제와 교통로를 함께 살펴보면 영토 확장이 단순히 땅을 넓히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넓어진 지역을 관리하고 사람과 물자가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체계가 국가의 성장에 뒷받침되었습니다.

4. 발해는 당나라·일본·신라와 어떤 관계를 맺었을까?

 

발해의 대외 관계는 군사적 충돌과 외교적 교류가 함께 나타났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주변국과의 관계는 항상 같지 않았으며, 당시의 국제 정세와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 당나라: 무왕 시기에는 군사적으로 대립했지만, 이후에는 사신 파견과 문물 교류가 이어졌습니다.
  • 일본: 사신을 파견하고 해상 교류를 이어 가며 외교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 신라: 남쪽에서 국경을 맞댄 국가로, 시기에 따라 긴장과 교류가 함께 나타났습니다.

발해는 주변국과 경쟁하면서도 외교와 교역을 활용했습니다.

 

이는 발해의 성장이 군사력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국가를 유지하고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서는 주변국과의 관계를 조절하는 외교적 역량도 필요했습니다.

5. 발해는 왜 926년에 멸망했을까?

 

발해의 멸망은 거란의 침입이라는 외부 요인과 발해 내부의 정치적 상황을 함께 살펴봐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내부의 혼란이 멸망의 유일한 원인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793년 문왕이 사망한 뒤 발해에서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여러 왕이 잇달아 즉위했습니다.

 

왕위 계승이 안정적으로 이어지지 못했던 시기가 있었고, 818년 선왕이 즉위한 뒤 발해는 다시 성장했습니다.

 

이후에도 발해의 정치 상황과 주변 정세는 계속 변화했습니다.

 

한편 10세기 초에는 야율아보기를 중심으로 거란의 세력이 커졌습니다.

 

거란은 주변 세력을 복속시키며 요동 지역으로 진출했고, 발해와도 군사적으로 충돌했습니다.

 

발해는 924년 거란을 공격하는 등 맞섰지만 양국의 대립은 계속되었습니다.

 

925년 말 거란은 발해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926년에는 발해의 주요 거점인 부여부가 함락되었고, 거란군은 수도 홀한성까지 진격했습니다.

 

발해가 보낸 군대도 거란군을 막아 내지 못했고, 수도가 포위된 뒤 발해는 항복했습니다.

 

발해가 거란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한 배경으로는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과 주변 세력에 대한 통제력 약화 등이 거론됩니다.

 

그러나 발해의 멸망을 이러한 요인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거란의 군사적 성장과 공격,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남아 있는 사료만으로 발해 멸망의 구체적인 원인을 모두 밝히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발해의 멸망은 내부의 정치적 상황과 외부의 군사적 압박이 맞물린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신중합니다.

6. 발해 멸망 이후에도 역사는 이어졌다

 

926년 발해 왕조가 멸망했다고 해서 발해를 구성했던 사람들과 문화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일부 발해 유민은 거란의 지배에 저항했고, 발해를 계승하려는 부흥 운동도 나타났습니다.

 

고려로 이동한 발해 유민도 있었습니다.

 

발해 멸망 이후의 역사는 한 국가의 종말과 그 사회를 구성했던 사람들의 운명이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발해 유민의 이동과 부흥 운동을 함께 살펴보면 발해의 역사를 926년이라는 한 해에만 가두지 않고, 이후 동북아시아의 정치적 변화까지 연결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발해 역사 한눈에 보기
구분 핵심 내용
건국 698년, 대조영
무왕 군사력 강화와 대외 영향력 확대
문왕 외교 관계 안정과 국가 체제 정비
선왕 영토 확대와 해동성국의 전성기
중앙 정치 3성 6부
지방 행정 5경 15부 62주
멸망 926년, 거란의 침입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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